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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와 아무 말/다섯 밤과 낮

2021. 03. 12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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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는 승진이 집에 가서 저녁을 먹었다. 승진으로 말할 것 같으면 20년 가까이 내 인생에 최장 출연, 최다 등장, 최고 중요 인물로 활약하고 있다. 심지어 지금은 옆 집에 살고 있는데, 이 집은 여러모로 멋진 집이지만 가장 사기 급의 스펙은 단연 그 것.
나는 초등학교 때 부터 나의 모든 대소사들을 승진에게 말하는 동안 결정하며 살아왔다. 승진에게 말하는 것이 내 생각을 정리하는 최고의 방법임은 이미 입증된 바가 많은데, 주저리 주저리 말하다 보면 늘어 놓은 생각들이 본디 있어야 할 방에 하나 둘 씩 굴러 들어가고, 어느 순간 아! 다들 제 자리를 찾아 갔구나 하는 깨달음의 순간이 온다. 그래서 나는 승진이가 없으면 어떻게 살지? 승진이가 없는 사람들은 어떻게 살지? 라고 진심으로 생각하게 된다.

어제는 승진에게 한참 리추얼 이야기를 하다가 문득 깨달았다. 끈기라고는 없는 내가 대체 이걸 3주 째 어떻게 하고 있지? 첫 째로는, 밑미 서비스가 꽤나 훌륭하다. 서로를 지지하고 함께하게 만드는 모임과 인증의 기제 수준이 적절하고, 나에게 잘 맞게 설계되어 있다.
둘째로는, 아, 별 생각 없이 그냥 해서 그렇구나. 하루도 안 빼먹고 해야지 그래서 막 짱 멋있는 사람이 돼야지 이런 다짐 없이, 매일 아침 일어나기 싫고, 하는 동안 매 1분 마다 그만하고 싶지만, 그냥 해서 그렇구나. 너무 위대한 사람들도 처음에는 그냥 했을까? 나도 이런 매일이 쌓이면 언젠가 위대해질까?

시작이 반이다. 이제껏 핑계로 변명으로 위로로 써먹었던 이 말을, 처음 말하고 이제껏 말해 온 사람들은 이 비밀을 알고 있었던 거다. 블로그를 만들어 글을 써 볼까하는 생각을 처음 한 때로 부터 진짜 만들기 까지 5년은 걸렸다. 그런데 막상 시작해 보니 이렇게 그럭 저럭, 여기에 무엇이든 쓰는 게 별 일도 아니다. 아침 요가도 마찬가지. 내가 얼마나 잠자는 걸 사랑하는데, 아침 잠을 아껴야 하는 일을 시작하다니? 한 달 전만 해도 나랑은 상관 없었고, 없을 일이었다.

늦게까지 이야기하는 동안, 남자 친구가 카톡으로 오늘 자신의 행복한 일은 회사에서 칭찬왕으로 상을 받은 일이라고 말해주었다. 너무 귀여워서 심장이 아팠다. 심장을 잡고 이거 내일 일기에 꼭 써야지, 하고 생각했다. 매일 글을 쓰기 시작하면서, 매 일에 이야깃거리가 얼마나 많은지 알게 된다. 좋은 일은 바위에 써서 남기고 나쁜 일은 써서 훌훌 털어 먹게 된다. 매일 내가 글을 시작하지만, 끝나는 곳에는 글이 데려다 놓는다. 이 글들이 모이면 나를 어디로 데려다줄까. 그것도 그냥 가보면 알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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