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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와 아무 말/다섯 밤과 낮

2021. 04. 08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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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젯 밤에 아주 재밌는 일이 있었다. 대학생 때 해외 봉사 활동에서 만난 친구들과 톡을 하다가, 그 때 같이 만들었던 책을 꺼내보았다.

준비 기간이 약 한 달, 봉사 기간은 2주가 조금 넘었던 것 같다. 순식간에 만들어진 작은 사회는 아주 끈끈한 소속감을 이루었고, 나의 20대를 만든 수많은 결정과 관계에 상당한 영향이 되었다. 10년 가까이 지난 일들이, 새벽같이 나와 자르고 붙이고 준비했던, 텁텁하고 뜨거운 노란 빛의 모래 운동장이 아직도 어렵지 않게 그려진다.

봉사가 끝나고, 우리는 귀한 기억들을 기록으로 남기고 싶었다. 그 중 하나가 책을 만드는 것, 50명이 저마다 한 두 편 씩 주제를 나눠 무언가를 썼다. 당연히 모두가 처음 해보는 일이었고, 몇 안 되는 디자인과 학생이었던 내가 150장에 달하는 페이지를 디자인했다. (취준을 앞 둔 대학생의 열정이란 뭘까) 댓가에 대한 생각을 전혀 하지 않았다는 게 신기하다.

시디과 수업 한 학기 청강할 때 배운 인디자인과 타이포그래피 기본기를 요령껏 써먹었다. 모르는 건 구글링하고, 핀터레스트 비핸스 갖고 있는 책 다 펼쳐보면서 만들었다. 오랜만에 보면 부끄럽겠거니 했는데, 의외로 썩 괜찮았다. 조금 서툴러도 얼마나 애썼는지, 한 장 한 장이 아득하고 기특했다. 좋아서 하는 일이란. 정말 좋아서 했구나.

떠올려보니 봉사 단체 지원을 받아 이 책을 백 개가 넘는 대학교에 배부도 하고, 시에서 상도 몇 번 받았던 것 같다. 까맣게 잊고 있었다. 각 조에서 대표로 편집을 도와준 친구들과는 아직도 가까이 지낸다. 요걸 핑계삼아 한 번 만나자고 할 참이다. 책을 나눠가진 50명 모두는 아니라도, 몇몇 친구들의 집 어딘가에는 여전히 꽂혀 있을 것 같다. 이사 갈 때든, 청소할 때든, 우연히 펼쳐보고 나처럼 기억에 잠길까. 그것만으로 아주 충분한 것 같다.

예전엔 이랬는데 지금은 못해, 하는 이야기를 좋아하지 않는다. 농담이라도 왠지 자존심이 상해서. 여전히 나에게 그런 철모르고 용감한 힘이 있다고 믿는다. 아니 그 막연하게 넘실댔던 힘이 쑥쑥 자라서, 꽤나 진득하게 모양을 갖춘 기질이 되었다고 믿는다. 그런 것들이 모여서 지금의 내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마음이 부풀어오르는 아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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