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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와 아무 말/다섯 밤과 낮

2021. 03. 26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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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일이다! 하느님 감사합니다. 어제 먹은 지코바가 맛있어서 감사합니다. 반이나 남아서 오늘 반찬 걱정이 없어서 감사합니다.

 

오늘은 차분하게 문서를 작성할 시간이 좀 있다. 나와 같은 일을 하는 사람들 많고 많지만, 저마다 가장 좋아하고 잘하는 업무는 다를진데, 나는 상세 설계 문서 작성을 좋아하고 꽤 공을 들이는 편이다. 깔끔하고 명확하고 읽기 좋은 설계서를 보면 좀 안 먹어도 배가 부르고 그런다. 이왕이면 줄도 잘 맞았으면 좋겠고, 여백은 넉넉했으면 좋겠고, 중요한 글자는 크고 안 중요한 글자는 작았으면 좋겠고, 맞춤법과 띄어쓰기 안 틀렸으면 좋겠고, 문서에서 반복해서 쓰는 요소들은 일관성이 있었으면 좋겠다.

 

이른 바 '처음부터 완벽한 설계서'라는 것은, 태어날 때 부터 아이큐 200인 사람 처럼 유니콘스러운 존재다. 인간의 실력이나 오류 문제를 차치하고, 설계서는 이후의 작업이 진행되도록 첫 시작을 끊는 주체이기 때문이다. 디자인과 개발과 QA가 진행되면서 수없이 추가되고 지워지기를 반복한다. 구현할 때 비효율적이라서, 유관 부서 협의가 잘 안풀려서, 더 좋은 방법이 있어서, 일정 상 스펙 아웃되어야 해서... 프로젝트가 마무리 되어 볼 사람이 아무도 없어질 때가 되어서야, 완벽한 설계서에 가까워진다.

 

고치고 또 고쳐야 한다는 것을 고치는 중에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매번 이 모든 난리통을 차곡 차곡 정리해서 열심히 반영한다. 모두가 읽고 이해할 수 있는, 이왕이면 깔끔하고 예쁜 다음 버전으로 거듭하여 내놓는 것이 나의 중요한 책무 중 하나다. 결국에 기획자에게 기획은 제품과 설계서로 남게 되니까.

 

남의 설계서를 볼 때면 생각한다. 흑흑 케이스 개많아 정책 정리 얼마나 힘들었을까... 흑흑 디펜던시 개심해 협의하느라 얼마나 힘들었을까... 흑흑 업데이트 로그 개길어 버전업 몇 번 한거야... 흑흑... 흑흑... 흑흑...

누군가 내 설계서를 보면서 읽기 좋다고 생각해주면 좋겠다. 설계서를 읽고 속이 시원해졌으면 좋겠다. 읽는 사람이 읽기 좋아야 제품도 잘 만들어지니까, 협의도 쉬워지니까, 두 번 작업할 거 한 번 할 수 있으니까. 당연히 설계서를 읽고 속이 시원해질 수 는 없다. 설계서를 읽은 사람은 이제 만들어야하니까 갑갑한 게 인지상정이다. 그래도 그런 마음으로 오늘도 설계서를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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