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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노트 : 철학은 어떻게 삶의 무기가 되는가 - 야마구치 슈

june night 2023. 7. 20. 1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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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굿플레이스’에는 세상의 근간이 되는 절대적 시스템이 존재한다. 사람이 사는 동안 한 모든 행동에 선과 악을 따져 점수를 매긴 뒤, 생명이 다하면 각각 굿플레이스와 배드플레이스로 보낸다. 주인공은 일련의 과정을 통해 최근 몇 백 년 간 굿플레이스로 갈 수 있을만큼 플러스 점수를 얻은 인간이 단 한 명도 없다는 것을 발견한다. 순수한 개인이 사과를 한 알 먹는 것도, 그 사과를 이곳에 도착하게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탄소 발자국, 부당한 노동, 악덕 거대 기업의 매출은 물론이고 굴러떨어진 사과에 깔려죽은 개미의 죽음에도 기여하는 꼴이 된다는 것이다. 마이너스 점수는 부지불식간에 눈덩이처럼 불어나고, 그러고보면 당연히 나도 지옥행을 면할 길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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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파민 폭발! 자조적으로 혹은 밈처럼 흔히 쓰이는 말이다. 오늘도 화장실 가는 순간조차 오른손으로는 풀투리프레시를하며 도파민을 찾아나선다. 내가 만들고자하는 서비스의 목표도 바로 이것 뿐.

 

인스타그램, 유튜브, 틱톡이 정말로 세상을 망쳤을지도 모른다. 소비를 과시하는 것이 모든 계급과 문화에서 최상의 가치가 되고 이에 대해 일말의 성찰도 기대하기 어려워진 시대다. 개인도, 사회도, 지구 환경도 더 건강해졌을리 없다. (때문에 작가의 ‘소셜미디어가 공동체의 대체재가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의견에는 동의하기 어려웠다.) 문제는, 나는 그리고 우리는 그런 제품을 만들고싶다는 것이다. 조금 더 많은 시간, 조금 더 많은 클릭. 르상티망의 최대 최대 최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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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전 쯤 인상깊게 본 다큐 ‘소셜 딜레마’는, ‘상품의 대가를 치르지 않는다면 내가 상품이다’고 정곡을 찌른다. 과연. 무비판적으로 거대 시스템에 기여하는 행태를 경계해야함이 이제는 상식이 된 모양이지만, 소비자의 자리에서 몸을 돌려 공급자로서 기여하고있는 시스템에 한해서는 순진하게도 양심의 저울을 기울여 보지 않았던 것 같다.

 

유저가 스치는 길에는 반드시 광고를 깔아두고, 놓쳤던 샛길을 찾아내 광고를 하나라도 더 깔면 바로 매출로 돌아온다. 클릭한 것을 잘 분석해 좋아할만한 것을 더 많이 보여주는 건 당연하고, 평소 사용 패턴에 따라 잊을만할 때면 반드시 다시 돌아올 수 있도록 알림 정책을 촘촘히 차별화해둔다. 조금 더 많은 시간, 조금 더 많은 클릭! 유저의 문제를 해결하고 삶을 풍요롭게 하기 위해 하는 이 일에서, 누군가는 조작된 행복을 열망하다 우울해지고, 가족과 보내야할 시간을 낭비하고, 가짜뉴스가 확산되고, 서버를 유지하기 위한 자원은 소모되고 있겠다.

 

나는 대가를 받는 만큼 맡은 일을 잘하는 직장인, 완성도있고 영향력있는 결과물을 만들고 싶은 직업인, 이를 통해 만족감과 가치 증명을 얻고 싶은 자연인일 뿐인데도 이렇게 악의 탑에 자갈돌 하나씩 올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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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일이 유난히도 그러한가? 따져보지만 현대사회에 그렇지 않은 일은 별로 없는 것 같다. 작가는, 매우 잘게 쪼개지는 분업으로부터 우리의 개인과 양심이 분리되고, 우리가 만든 시스템에 목적이 종속되어버렸다고 말한다.

 

이상적으로는 모든 사람이 ‘더 나은 세상’을 위해 일해야하고 양심도 이에 빗대어 작동해야할진데, 회사의 목표는 회사의 이익이, 개인의 목표는 개인의 행복이자 명예와 부가 되어있다. 그것이 설령 사회 전체의 이상향에 반하는 지점이 있더라도 여간해서 잘 드러나지 않는다. 개개인의 자리에서 나의 행위가 흘러 도달할 도착점은 너무 멀어 보이지도 않기 때문에 그렇고, 상술한 개인의 행복 추구가 좋은 명분이 되어주기 때문에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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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리로 여겨지던 '굿플레이스' 시스템에도 결함이 있었다. 세상은 극도로 복잡해졌지만 점수를 매기는 기준은 선사시대부터 여즉 변하지 않았던 것이다. 삶의 대가를 공정하게 판단하려던 목적은 시스템에 의해 소외되어버렸다. 그 결함을 찾아내고 인간의 편에 선 주인공 일행은 결국 굿플레이스에 도착하지만, 그 역시 기대와 같이 완벽한 곳이 아님을 알게된다. 

 

완벽함을 찾아내기 어렵기 때문에 적당함에 만족하곤한다. 삶에 무언가 눈에 띄게 기울어지거나 큰 소리를 내며 무너지지않으면, 그러니까, 무사히 회사를 다니고, 별 일 없이 업무가 굴러가고, 그 결과물이 목표한대로 쓰여지고있으면, 그야말로 적당한 것 처럼 보인다.

오늘 읽은 철학은 무기라기보다는 거울이다. 드러내고싶지 않은 괴로움을 비춘다. 도저히 선하게 살 수 없을 것만 같은 현대 사회에서 어떤 사람으로 살아야하나? 당장 생각하는 최선은 거울에 비추어 보는 것 뿐이다. 무비판이 악이라면 그 반대를 취할 수 밖에 없다.

 

비판은 때로는 말 그대로 악마처럼 괴롭다. 스스로의 적당함에 만족하지 않는 것이 대단한 날갯짓은 될 수 없을지라도, 어쩌면 결함을 발견하는 곁눈질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나의 발전, 나의 평화, 나의 만족에 몰두하느라, 아니 그것만으로도 벅차서 돌아보지 못하는 우주의 벽돌 한장으로서의 나를 생각해본다. 기획자로 일하는 나의 윤리는 어떤 모양이어야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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