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03. 16 (수) : 서른 두 살에 입시 미술 유튜브를 보는 사람

나의 스트레스 위험 지표같은 꿈이 있다.
그건 바로, 중요한 시험을 코앞에 두고 공부를 하나도 안한 꿈!
벌써 수 십 번을 속았는데도 나는 번번히 망연한 고딩이 되어 울상으로 눈을 뜬다.
나는 평생을 벼락치기 인간으로 살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살아도 괜찮은 순간이 어디까지인지, 그 마지노선의 감이 정확히 체득되어 있기 때문에
이를 놓쳐버렸다는 아찔함은 상당한 공포인 것 같다.
나는 꽤 자주 입시 미술 유튜브를 본다.
주로 대형 미술학원에서 올리는 영상인데, 합격작, 연구작을 재현하거나, 작법을 시연하면서 기술적인 팁을 알려준다.
라떼는 말이야... 다른 학원 그림 보려면 미대입시 잡지를 구독해 보거나 학원 쌤이 교수 평가나 대회에서 몰래 찍어오는 거 보는게 다였는데.
유명 학원들 간에는 스타일 경쟁과 눈치 싸움이 엄청나서, 작품이나 기술도 극비에 가까웠는데.
세상이 변하니까 이런 것도 변하는구나.
그런 생각도 하고
입시 미술의 품질과 철학도 계속 진화하는구나, 혹은 아직도 저건 저렇게 하는구나.
그런 생각도 하고
이제와보니 이 종목 꽤나 정직한 것 같은데. 따라하기만 해도 잘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그때는 왜 그렇게 어려웠을까.
그런 생각도 하고
그 시절의 긴장과 좌절, 막연함같은 것들이 얼핏 스치기도 한다.
물론 와 형태 정확하게 잘 딴다 색 희한하게 잘 만든다 묘사 기가 막히다 면을 저렇게 쪼개네.
이러면서 보기도 좋다.
입시 미술은 정답과 규칙이 있는 창조이다.
수학 문제를 풀면 스트레스가 풀린다는 사람도 있듯
어떤 답을 향해 가는 반듯한 과정이라 안정감을 준다.
심지어 그 답과 과정이 시각적으로 아름답고 내가 잘 이해할 수 있는 문법이니
이게 나에게 편리하고 좋은가 보다.
내가 실로 사랑하는 그림들은 정형성과는 거리가 멀다.
규칙만으로는 결코 도달할 수 없는 영역임을 알기에 경이롭다.
위대함으로 가는 길에 규칙이 있다면...
내 동년배들은 프린세스메이커라는 게임을 했다.
플레이어가 아버지가 되어, 어느 날 하늘에서 뚝 떨어진 딸을 키우는 게임인데,
게임 안에 학습, 노동, 무사수행 등 재밌는 장치가 아주 많고, 그것을 어떻게 경험하느냐에 따라 수십 개의 다양한 엔딩을 볼 수 있어서 무척 좋아했다.
딸에게 미술을 배우게하면, 매일 예술 경험치가 1씩 오르고, 100번 쯤 보내면 만렙을 찍는다.
그 때가 되면 딸은 특정 그림을 그리게 되고,
그 작품을 예술제에 제출하면 반드시 1등을 한다.
인생도 그렇게 명료하다면...
입시 미술 시연 영상을 하도 보았더니,
그 분명한 규칙의 세계에서도, 자기만의 언어를 찾아낸 사람들을 발견했다.
100번 미술 학원에 가기만하면 대학에 붙게 되어있는 세상이 아니라서
정해진 그림을 그리면 무조건 1등을 하는 게임이 아니라서
아마도 그렇게 되었을 것이다.
어디까지 왔다고 알려주지 않아서
시간을 보낸 것만으로는 보상받지 못해서
퍽 서운한 날에는 기억해야한다.
내가 사랑하는 그림들
선을 벗어나는 터치와 실제와 같지 않은 색들
답지가 주어지지 않은 대신
답이 아닌 것에 아름다움을 느끼는 마음이 주어졌음을